병든아이
이승하
손꼽 아 기다린 날 어린 날의 설날 아 침
누이는 설빔을 입고 방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발갛게
한 자루 촛불로 떨고 있었다 먼 곳에서 밀물처럼
몰려온 친척들 썰물처럼 떠날 때까지 한마디 말이 없던
수줍음 많은 누이, 어둠의 심연으로 왜 숨고 말았을까
왜 숨쉬고들 있을까 내 철없이 죽음을 실험하려 했을때
- 작은오빠, 다시 집 나가더라도 자살은 하지마
약 빼앗아 품에 넣고 한사코 안 주더니 회복 불가능한
수동형의 삶을 내처 살고 싶었던 게지 스물세살부터
두 눈의 초점을 잃어갔다 심야에 부나방처럼 돌아다니고
창문에다 쾅쾅 담요를 치고, 식사 도중에 저 혼자서
킥킥 웃기도 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고려대 부근 아무개 신경정신과 병원
- 가족이라도 3개월이 지나야 만날 수 있습니다
술병을 깨 들고 외치고 싶었다. 웃통을 벗고서
심판할테야! 너한테 폭력을 가한 우리 아버지를!
폭력을 사주한 우리 어머니를 ! 안암동에, 제기동에
서울역 앞까지 파도가 쳤다 무너지는 건물들,
떠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수많은 상처받은 혼을
-작은오빠, 부모님을 그만 용서하자 우리도 죄가 많으니
차라리 곱게 미쳐 용서하고 만 내누이야, 하나뿐인
이 지상은 명백히 꼬여 있는 질서로 움직이는데
너는 허공만 보고 있을래 멍하니, 그렇게 멍청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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