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를 알 수 없는 아니 어느 밭에서 오게 되었는지 출처를 밝혔을텐데 잊어버렸을게다.
그렇게 아파트 베라다 한 켠을 자리 잡고 있던 늙은 호박이 추위 때문인지 병들고 있었다.
저대로 방치하다가는 누군가 애써 농사지어 보내 준 호박이 제 구실도 못한 채 쓰레기에 묻힐 듯 하다.
쉬고 싶은 몸의 이기적인 욕심을 잠시 내려놓고
호박을 주방으로 들이고 칼과 감자깎는 칼을 꺼냈다.
병든 부위를 도려낸 후 호박씨를 긁어내고 껍질을 벗겼다.
껍질이 어찌 단단한지 칼에 손이 베이고 대일밴드를 찾는 수선을 떤 후에 감자깎는 칼로 슥슥 벗겨내기 시작.
복스럽던 둥근 호박은 알몸이 되었다.
이제 무엇을 할까?
얇게 썰어 말리자니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겠고...
그래 호박죽이다.
인터넷에서 호박죽 레시피를 출력해보니
어라! 호박만으로 호박죽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
호박을 잘게 썰어 앉히고.. 썰어 놓으니 사골냄비에 하나가득이다.
찹쌀은 다행이 있으니 분쇄기에 갈아놓고
강낭콩이나 팥은 반숙으로 삶으라는데
삶을 콩이나 팥이 없으니 어쩌나
일단 호박냄비를 약한 불에 올려놓고
운전은 포기하고 걸어서 가기로 작정
모자에 목도리에 오리털 파카에 온몸을 꼭꼭 싸매고
눈이 내리는 밤거리를 나섰다.
눈이 제법 쌓였고 또 제법 내리고 있다.
신호대기에 멈춰섰던 차들이 출발을 못하고 헛바퀴를 돌린다.
눈이 콧잔등에 살포시 내려 앉는다.
아리게 시원하다.
나무마다 예쁘게 차려 입은 눈 옷을 뽐내고 있다.
눈내리는 야경을 감상하며 팥 한 봉지 사들고 들어오니
호박이 형체도 없이 퍼져있다.
팥을 불릴새도 없이 가스렌지에 올려놓고
찹쌀을 물에 개어 넣고 저어가며 한 번 끓여내니 제법 호박죽다운 모양새가 되고 있다.
팥이 퍼질새도 없이 찹쌀가루를 넣은 호박죽에 넣어 휘~이 저어가며 한 번 더 끓여내니
팥이 송송 박힌 호박죽 완성이다.
병들어가던 호박이
먹기 좋은 호박죽으로 다시 태어났다.
제 구실을 다 마친 후에